요약
- Cronus의 가상 근거리망 VLN은 IP와 물리망 사이의 일정한 접점이었다. 그 접점의 동작을 지키면 물리망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
- 이 교체에는 개별·전체·그룹 주소, 외부 게이트웨이, 가상 주소와 물리 주소의 대응표, 패킷 크기와 전달 방식에 관한 구체적 약속이 따라왔다.
근거리망이 너무 비싸거나 느리거나 설치 장소를 견디지 못하면 바꾸고 싶어진다. 문제는 위에 있는 프로그램이 낡은 망의 버릇을 너무 잘 알고 있을 때다. William I. MacGregor와 Daniel C. Tappan은 RFC 824에서 Cronus 분산 운영체제의 해법을 제안했다. 프로그램은 Virtual Local Network, 곧 VLN을 상대하고 VLN이 실제 물리망을 상대한다. 아래층 배선을 갈아도 IP는 익숙한 창구에서 계속 일한다. 이사 때문에 건물 전체에 새 주소를 외우게 하지 않겠다는 셈이다.
1982년 8월 문서의 계층 그림은 간결하다. TCP와 UDP 아래에 IP, 그 아래에 VLN, 맨 아래에 물리 근거리망이 있다. 저자들은 목표를 호환성과 대체 가능성이라고 적었다. VLN은 DARPA의 IP와 맞아야 하고, 따라서 IP를 사용하는 TCP에도 맞아야 한다. 동시에 물리망을 다른 종류로 바꾸더라도 VLN 창구의 의미는 유지해야 한다. 위쪽 소프트웨어가 믿는 것은 특정 케이블이 아니라 이 접점의 약속이다.
바꿔야 할 이유로는 비용, 성능, 기계적·전기적 내구성이 제시된다. 서로 다른 Cronus 군집은 서로 다른 물리망을 쓸 수 있었다. 호스트마다 프로그램 내부 표현은 달라도 접점이 제공하는 기능은 같아야 한다. 물리망을 교체하려면 각 Cronus 호스트에서 VLN을 새로 구현해야 한다. 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 층에 모인다. 그 덕분에 다른 모든 프로그램을 한꺼번에 고치는 사태를 피할 수 있다.
IP를 그대로 둔다는 조건도 분명했다. 문서는 VLN 위의 IP에 수정이나 확장이 필요하지 않다고 썼다. 한 군집의 호스트는 같은 물리 근거리망에 붙는다. 군집 밖으로 향하는 데이터그램은 VLN이 인터넷 게이트웨이로 보내고, 밖에서 들어온 데이터그램은 알맞은 호스트에 전달한다. VLN 자체가 인터넷의 한 네트워크이며 네트워크 번호도 가진다. 밑의 물리망 번호는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다. 위에서 보이는 이름을 지켰다고 해서 아래의 출구 계산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주소 방식은 가상이라는 말에 실체를 준다. VLN 클라이언트는 한 호스트, 모든 호스트 또는 멀티캐스트 그룹을 대상으로 보낼 수 있다. RFC의 로컬 주소 표는 0–1,023을 개별 호스트에, 1,024–65,534를 멀티캐스트에, 65,535를 전체 방송에 쓴다. 이 범위를 담기 위해 당시의 A급 또는 B급 네트워크를 권했다. 이는 1982년 Cronus 설계의 숫자다. 핵심은 하드웨어가 바뀌어도 세 가지 수신 대상이 같은 뜻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더넷 구현 예에서는 숨은 노동이 더 또렷하다. 각 호스트는 VPMap을 두고 32비트 VLN 호스트 주소를 48비트 이더넷 주소에 대응시킨다. 물리 주소만 바뀌고 VLN 주소가 그대로라면 다른 호스트의 오래된 표는 틀린 길을 가리킬 수 있다. 문서는 동적 표를 다시 만들기 위해 접점을 초기화하는 방안까지 다룬다. 위층 프로그램은 이사를 몰라도 된다. 배달 담당 층은 새 집 주소를 알아야 한다. 주소록이 낡으면 추상화는 아주 정중하게 편지를 잃어버린다.
전달 약속에는 크기와 한계가 있었다. 길이 576옥텟 이하의 데이터그램은 어느 두 VLN 클라이언트 사이에서도 옮길 수 있다. 더 큰 것은 특정 호스트 쌍에서는 될 수 있다. VLN은 IP 데이터그램을 분할하거나 재조립하지 않고 IP 옵션도 처리하지 않는다. 모든 패킷의 도착을 보장하거나 손상·폐기된 패킷에 부정 응답을 주지도 않는다. 다만 도착한 패킷은 보낸 내용을 정확히 나타내야 하며, 각 예정 수신자에게 한 번 도착하거나 아예 도착하지 않아야 한다. 군집 안에서 받은 데이터그램은 보낸 순서의 부분열을 이룬다. 몇 통은 빠질 수 있어도 남은 편지의 순서를 뒤집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 RFC의 매력은 «망을 바꿀 수 있다»는 문장 뒤에 업무 목록을 붙였다는 데 있다. 주소의 뜻, 게이트웨이, 공통 패킷 크기, 손실을 허용하는 전달 규칙까지 정해야 비로소 위쪽 소프트웨어가 새 장비를 모른 채 지낼 수 있다. 물리망을 바꿀 자유는 아래층이 정확히 무엇을 책임질지 쓴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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